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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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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설립배경

학교법인소개 :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학교법인소개 대체텍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학교법인소개 대체텍스트

반만년 역사의 토대 위에 일제의 유산은 민중의 우매함을 가져왔으며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고향 농촌이 황폐화되고 헐벗고 굶주린 농민의 자녀들은 배움의 길이 막혔다.

나는 향리인 함안에서 배움의 횃불을 밝혀

無知 를 깨우치는 智惠로운 인간

貧困 을 극복하는 誠實한 인간

疾病 을 타파하는 健康한 인간

을 기르는 것을 건학의 정신으로 삼는다.

명덕육영회 설립

시대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물러간 뒤 이 땅에 남은 것은 무지와 질병, 빈곤이었다. 36년 동안 계속됐던 그들의 집요한 수탈과 우민(愚民)정책의 결과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민족적 생존과 그 역사를 다시 이어가야 할 시점에 섰지만, 나라 안에는 사실상 믿을 만한 지도자와 지도세력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수많은 인재들이 희생되거나 변질해 버렸으므로 민족의 의지와 역량을 결집시킬 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사회혼란의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세계는 제2차 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지식과 기술의 대중화에 의해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었다. 고도화된 과학기술로 모든 산업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인간의 생활은 날로 편리하고 풍요로워졌으면 농사는 기술영농으로 변모해갔다.

그와 같은 세계의 기류 속에서 전근대적 농업 경제에만 의존해 있던 우리에게도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보급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따라서 이를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적인 과제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가려고 할 때에 불행하게도 6·25라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큰 시련으로 말미암아 한국교육 이념의 실현도 거의 중단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6·25때에 우리 교육을 수호한 곳이 바로 이곳 경남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 방위선이 낙동강이었을 때 문교부가 1951년 1월 7일 부산시청을 임시 사무처로 결정하고 흩어진 교원을 모아 교육체제를 재정비하려고 노력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란 속에서도 각 지역에서 피난 온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은 대단하였다. 그때 국내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각급 학교들의 있기는 했으나 이는 식민정책에 따른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전체 국민의 80%가 넘는 농촌에는 고작 초등교육과정인 초등학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초등교육을 마친 농촌의 자제들은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으려면 도시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빈궁한 농촌가계와 불편한 교통으로 이들의 진학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 학교들이 군내의 학령기 아동들에게 초등교육 과정을 맡고 있었으나 해마다 1,8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내고 있는 이 지역에 중등교육 기관은 함안농업중학교(6년제) 한 곳뿐이었다.

이처럼 군북지역, 대산지역, 칠원지역 등은 중등교육의 불모지였다. 가깝게 위치한 마산지역에 마산상업중(현 마산동중), 마산중학, 마산여중 등 3개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인 창신중학교가 있을 뿐이었다(당신 중학교는 6년제였음).

그러나 현재와 같이 교통사정이 좋았던 때가 아닌 전시 중에 마산까지의 통학이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향학열에 불타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본 법인의 설립되던 1951년에는 농지개혁법의 시행령에 의거 사학재단들도 재단의 토지를 유실하여 사학운영 도는 예측하기 어려웠다.이에 1951년 6월 6일 문교재단 소유 농지 특별보상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으니 우기에 직면한 문교재단의 보호 육성을 위한 정책의 반영이었다.

이로써 사학재단의 위기는 다소 구제될 수 있었으나 그 토지의 대가로 받은 보상금으로는 학교를 경영할 만한 자원이 못되었다.

그러나 설립자 윤효량 박사께서는 6·25동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졌고, 농촌이 무지와 질병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직시하고 향토 함안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인재양성을 통하여 농업에 대한 지식과 기술의 보급으로 농촌 근대화를 이루어 무지와 질병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전시중이라 국가도 재정결핍으로 감히 엄두도 못내는 사립중등교육기관 설립이 가장 시급함을 느껴 부산과 함안에 있는 가옥과 토지를 희사하여 1951년 8월 30일 학교법인 명덕육영회를 설립하여 칠원중학교를 시작으로 현재 9개 중·고등학교의 개교와 학교법인 신민학원(구 부산해양고등학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명덕육영회 출범

향촌 선생의 인생관과 교육철학

학교법인 명덕육영회의 설립자 고 향촌 윤효량 박사는 1916년 7월 12일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185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덕천처사 윤기선 공은 1876년 이 고장에서 나서 자란 분으로 일찍이 1919년 영남 지역 최초의 3.1독립운동의 진원지인 이령 연개장터 만세사건에 가담한 선각자이시다. 그리고 마구선 국도, 칠원-영산간의 낙동강 덕촌 도선장을 사재로 매입하여 사재가 다할 때까지 3년 유여를 하루같이 수십만명을 무료로 도강시켰다. 길은 만인의 것이라는 높은 덕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또한 공은 의술을 진실로 인술로 시술하였다. 그가 터득한 신묘한 처방으로 조제한 약을 수천명에게 무료로 시약하였으니 어찌 한낱 편작에다 겨룰 수 있을 것인가. 일제의 유린으로 하늘이 어두웠던 시절 이 나라의 앞날을 교육에다 걸었던 그는 향리인 이령에 경명학교(1940년)를 세웠다. 그 곳에서 자란 나무들이 지금 조국의 강산을 푸르게 덮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공의 홍익정신은 향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멀리 합천 삼가의 불모지에 보를 쌓아 옥토를 바꾼 일은 국토재건의 선구로 지금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그는 1952년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러나 뒷날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에게 아들 윤효량 씨가 있어 부업을 계승 발전시켰으니 참으로 이 고장의 홍복(洪福)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오로지 육영을 통한 무지 .질병. 빈곤 타파의 의지를 가지고 사회 사업으로 평생을 남을 위해 베푸신 분이다. 선생은 동아대학교 법정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시고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신 후 미국 LA 성서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한때 관계로 진출하시어 경남 관재처 조사과장, 진주지구 관재처장을 역임하신 바도 있다.

1943년 10월 조선해륙운수 부산지점 노무과장 재직시 1만 노무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함을 비롯하여 1952년 부산 부두 노동조합 위원장 재임시 근로자의 생활 보장을 위해 전시하에 미군이 선생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는 극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두 번에 걸쳐 파업 투쟁을 감행, 한.미간의 국제적 타협을 거쳐 노임의 100∼300%를 인상하게 되어 3만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무지와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해결되는 지름길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근본임을 명심하고 1948년 3월 1일 사회 단체로서 명덕육영회를 창립하고 전국 중.고, 대학생 1,000여 명에게 학자금 조달 및 숙식 제공 등 장학사업을 하다가 1950년 6.25동란으로 도시는 물론 고향 농촌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배우지 못하자 이들을 위해 1951년 8월 30일 부산 및 함안에 있는 가옥 및 전답을 팔아 1951년 명덕육영회를 설립, 8월 30일 칠원중학교를 설립하고, 1952년 군북중학교, 칠성중학교, 칠원고등학교, 대산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54년에는 함안여자중학교를, 1966년에는 함안여자상업고등학교와 군북고등학교, 대산종합고등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육 불모지인 함안의 중등교육을 일으켜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도한 1951년 부산 중앙동에 불우한 향토출신 학생을 데려다가 숙식과 학비를 제공, 대학과정을 마치도록 한 고아학도 구호사업인 명덕애육원을 설립하여 1954년 전국규모로 확대, 서울 성북동에 중앙배영원을 설립, 200여 명의 불우학생을 면학하도록 하여 반세기가 지나는 지금은 각계 각층에서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교육이 국가 백년지대계임을 감지한 선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양개발이 조국 근대화의 보고임을 인지하여 1956년 학교범인 `신민학원`을 설립하여 부산해양고등학교를 개교, 우리 나라 유일한 해양개발 역군 양성의 요람일 뿐 아니라 해양인 양성기관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2년 부산해양고등학교는 국립 부산 선원학교와 통합, 국립 부산해사고등하교로 새롭게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 보국`의 굳은 신념을 심어 주신 설립자의 유지를 이어받아 감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사하구 감천동 634-60번지에 부일전자공업고등학교와 부일외국어고등학교가 제2의 도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또한 1957년에는 함안군 군북면 모로리에 음성 나환자촌 `예명원`을 개설 500여 명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을 비롯, 1960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에 `향촌원`을 개원하여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 정착촌으로 16만 평의 땅과 30동의 집단주택을 제공하여 자립 안정을 도모하는데 온갖 열성을 베푸셨다. 이 밖에도 1973년 부산 대연동에다 부산 양호학원을 설립하여 정신박약아와 지체부자유아를 수용 보육할 사랑의 집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한생애를 남을 위해 베푸신 향촌선생은 경남 학교법인 회장직과 사단법인 한국 상록 회장 및 동 경남 지부장, BBS 중앙연맹 이사겸 경남 연맹 회장, 함안 라이온스클럽, 창립 및 국제 라이온스 협회 309-B지구 총재등을 역임하셔서 대외활동 또한 대단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겨레의 옥돌이시며 참 삶의 방향타가 될 등대로 되어 길이 빛 날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비롯하여 부산 부두 노무자 일동의 송덕비, 함안 유지 일동의 교육공적비, 표창장 및 감사장이 무려 100여 종에 이른다. 비록 향촌 선생은 고인이 되셨지만 정부가 못한 일을 한 개인이 향토교육을 위하여 신념과 집념으로서 발벗고 나선 교육자요, 근로대중의 권익옹호를 위한 노동운동가요, 불우한 사람을 돕는 박애정신의 실천가인 사회사업가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선생의 선조 중 고려말기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시고 칠원 부원군에 봉해졌던 윤환공(尹桓公)이 "일찍이 칠원으로 돌아가기를 청함에 유동(柳同)에 살았다. 그 해에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형편이었다. 환은 자기의 재물을 헐어서 구제하고 가난한 백성이 꾸어간 재물에 대한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때 한창 가물었는데 환의 밭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나서 남의 밭에까지 젖어들어 큰 풍년이 들었다. 이에 백성들이 칭송해마지 않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선조대의 가훈을 이어받아 오로지 육영과 빈곤타파, 삶의 의지를 돕는 사회사업으로 평생을 남을 위해 베푸신 분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